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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 산문 / 문학동네 (2014)

gracenmose 2021. 4. 14.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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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 산문 / 문학동네

 

김영하 작가의 『보다』, 『읽다』 그리고 『말하다』 시리즈의 한 권이다. 다른 두권에 대해서는 책소개 및 내 생각을 쓴 내용이 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아래 링크도 읽어보세요)

말하다 , 김영하 / 문학동네 (2015)

읽다 / 김영하 산문 / 문학동네 (2015)

앞의 두 책은 작가라는 직업에 조금 더 직접적 연관이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 책은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 바라보는 인간 세계를 보는 관점을 보여준다. 자신의 이야기들도 담겨있다. 그의 젊은 시절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다.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것일까, 아님 남다른 경험을 통해 지금의 모습까지 오게 된 것일까. 분명한 건 어떤 것이던 간에, 그가 책을 써 줌으로써 책을 읽는 사람에게 새로운 세상과 만날 수 있게 해 준 점이다. 


본문 발췌 및 생각

 

p. 115 
이안 감독의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는 『오디세우스』와 유사한 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항해 도중 지난한 고생과 신비로운 모험을 겪은 주인공은 먼 훗날 자신을 찾아온 한 소설가 (그들은 만나기 전에 이미 서로를 알고 있었다!)에게 자신의 신비로운 고생담을 말해준다. ... 이 믿기 어려운 전설을 우리에게 전하기 위해 작가는 흥미롭게도 이천팔백여 년 전 호메로스의 트릭을 채택했다. 현명한 선택이었고 이 부분은 이안 감독의 각색과정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를 읽지는 않았지만, <라이프 오브 파이>는 봤다. 호메로스는 무려 이천팔백여년 전에 이 영화와 같은 구조를 택해서 글을 쓴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식의 구조인데, 지금은 이런 식의 구조를 가진 소설이나 영화가 많기는 하다. 중국 소설가 위화의 작품 『인생』 역시 그 구조를 택했다. 

 

이런 부분을 보면서 느낀 것은 작가들은 기억력이 정말 좋은 것인가, 아님 메모 습관이 아주 철저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다. 일단 작가들은 읽는 것 자체를 즐겼던 과거가 있다. 그리고 자신의 글을 쓰면서 읽은 것을 최대한 활용한다. 그런 것을 어찌나 잘 활용하는지.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런 책 후기를 쓸때도 바로 전 읽었던 책을 뒤적여야 쓸 수 있는데 말이다. 

 

p. 122
"사람마다 연극적 자아라는 게 따로 있는 건가요?"
내 질문에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인간에게 연극적 자아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연극적 자아가 바로 인간의 본성입니다. 어렸을 때 소꿉놀이를 생각해 보세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데도 아이들은 엄마, 아빠, 의사와 간호사를 연기합니다. 인간은 원래 연극적 본성을 타고 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소꿉놀이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아이들이 아주 쉽게 곧잘한다. 그 얘기는 누구나 연극적 본성을 타고 난다는 것이다. 아주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p. 143
그는 글쓰기를 통해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기징역이 구형된 날의 일기에는 죽음에 대해 썼고, 십오 년으로 감형된 날의 일기에는 서른일곱 살이 되어 출소하는 자신의 모습을 담담히 그리고 있었다. "아직은 너무 멀게만 느껴지지만 희망을 버리지 말자. 하루하루 의미 있게 살아가자"고 쓰여 있었다. ... 눈은 맑고 문체는 명징하고 말투는 공손했다. 
- 헌병대 수사과 소속으로 근무하면서 수감자들의 수양록(수감자들의 일기)을 편집해 책으로 내려면서 겪은 일

이 부분은 이전 책 『말하다』에서 언급했던 부분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이야기가 진짜 이야기라고 했다.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도 없는 이야기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 

 

p. 170
『뉴로맨서』의 작가 윌리엄 깁슨은 언젠가 이런 말을 남겼다. "미래는 이미 도착해 있다. 지역적으로 불균등하게 배분되었을 뿐." 그의 말대로 어떤 미래는 이미 실리콘밸리에 도착해 있다. 거기서는 구글이 제작한 무인자동차가 시내를 질주하고 있다. 어떤 나라의 어떤 미래는 이미 서울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내가 타려는 버스가 몇 분 후에 정류장에 도착할지를 미리 아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런 면에서만 본다면 서울이 뉴욕의 미래일 수 있다.

윌리엄 깁슨이라는 작가는 어찌 저런 훌륭한 멘트를 만들 수 있었을까? 작가가 바라보는 시각이 다른 것을 느끼게 해 주는 것 같다.

 

저러한 미래의 지역불균형은 이미 여러 곳에서 느낄 수 있다. 가끔 넷플릭스에서 보는 프로그램 중 하나는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다. 코로나 이후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들의 한국 생활 모습으로 바뀌어 있기는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한국에 와 있는 외국인이 모국 친구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며칠 여행을 하는 것을 보여주는 내용이다. 우리보다 선진국이라는 유럽에서 오는 친구들이 많은데, 많은 친구들이 와서 우리나라의 대중교통 시스템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만큼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가 한 단계 더 미래로 와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뒤쳐진 부분도 많다. 정치인들의 부패한 모습과 법의 불공정한 적용 등이 떠오른다. 법을 만드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들의 티끌은 보지 못하게 하는 것에만 더 몰두하는건 아닌가 싶다. 조금 더 투명한 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할 것인지 고민을 안 해 볼 수 없는 것이다. 

 

p. 208-209
우리는 정보와 영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본다'고 믿지만 우리가 봤다고 믿는 그 무언가는 홍수에 떠내려오는 장롱 문짝처럼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우리 정신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라도 책상 앞에 앉아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정해진 마감일에 맞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정연하게 써내도록 스스로를 강제하게 된다. 그렇게 적은 것을 다시 보고 고치는 것이 그 마지막이다. 

역시 생각을 적어야 한다. 뭔가를 기록해야 그만큼 생각이 깊어진다. 좋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좋은 책을 보고, 좋은 영화를 보고서는 '아! 좋구나!'만 하고 지나치면 나중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나마 지금 조금 발전해서, '이 부분은 블로그에 책소개하며 옮겨도 좋겠구나'하며 생각하는 것을 옮겨 적고 있으니 다행이다. 스마트폰 맨날 갖고 다니면서도 좋은 생각이 떠올랐을 때 메모하지 않았던 점을 반성하고, 앞으로 더 많이 내 생각을 적어보도록 노력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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